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민족국가 인도네시아는 민족적 동일성의 구체적 내용을 채워야하는 과제를 안고 출발했다. 그러나 광대한 인도네시아의 국경 안에 포함된 다양한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 기존의 어느 강력한 집단이 다른 집단들을 압도할 영향력을 가지지 않도록 안배해야만 통일 국가는 유지 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초대 대통령이 된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를 통합시킬 이념을 제시했다. 다섯 가지 중요한 원칙이라는 뜻의 판차실라가 탄생한 것이다. 인도네시아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했고 다양한 세력들의 통합을 통해 단일성을 유지하는 것이 정치적 과제인 상황에서 세력들 간의 이해 조정과 설득 그리고 대중 동원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수카르노는 판차실라 원칙으로 이 과제들을 수행하려 했다.

판차실라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유일신에 대한 믿음 2. 민족적 통일 3. 인본주의 4. 인민의 주권 5. 사회적 정의와 번영. 말만 놓고 보아서는 1번을 제외하면 계몽주의 이래로 서구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던 정치적 이념들의 나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원칙들 또한 구체적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판차실라 기념탑


먼저 유일신에 대한 믿음은 문구상의 종교적 느낌과는 달리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키기 위해 나온 원칙이다. 인도네시아는 종교적으로도 복잡한 상황이었다. 가장 많은 신자를 가진 종교는 이슬람이었다. 그러나 이슬람 안에서도 정통파와 개혁파가 나뉘어 있었다. 힌두교와 가톨릭, 개신교에다 전통신앙을 믿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력이 가장 강했던 이슬람 세력은 인도네시아가 이슬람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이런 정교일치의 시도를 막고 세속적 국가의 틀 안에서 특정 종교가 국가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알라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라는 원칙을 내세운 것이다. 판차실라의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라는 원칙은 이슬람을 포용하지만 정교분리를 관철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수카르노가 생각했던 민족주의 개념에는 인도네시아의 지리적 범위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진다. 이는 네덜란드 식민 세력과의 독립투쟁 과정에서 네덜란드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을 찾아오려는 투쟁의 과정에서 강화된 것이다. 인민의 주권이라는 개념도 근대 서구의 인민주권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초기의 인도네시아는 중앙정부의 힘이 약했고 지역 세력들의 힘이 상대적으로 강력했다. 판차실라의 인민주권 원칙은 서구근대의 것과 달리 독자적 지역 정치세력들의 독립성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다양한 지역적, 종교적, 인종적, 계급적 집단들의 자율권을 어느 정도 보장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민족국가 안으로 포용하기 위한 원리가 인민의 주권이다.

판차실라 원칙이 제기된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독립 직후의 인도네시아는 세력 간의 협상으로 많은 문제가 결정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회 상황은 인도네시아 초기의 의회민주주의의 문제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과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한 당이 없어서 주요 정당들 간의 합종연횡으로 구성된 내각은 수명이 짧아서 7년 동안 7 개의 내각이 들어서는 극심한 정치적 불안정을 겪어야 했다.

의회 정치의 주체가 되었던 정당들은 서구 정치문화의 정당들과는 달랐다. 대부분 큰 당들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훨씬 더 느슨한 집단들이어서 넓은 범위의 이념적 의견들과 정치적 스타일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당시의 가장 큰 당이었던 마수미당은 ‘개인, 사회 그리고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삶에서 이슬람의 가르침과 법의 실행’을 목표로 했다. 그들의 정치이념은 이슬람적 사회민주주의라고 묘사할 수 있다. 당의 지지세력은 주로 도시의 이슬람 사업가들로 개혁파 이슬람을 대변하는 정당이었다. 마수미 당에서 분리된 전통 무슬림의 정치적 대표당은 NU(Nahdatul Ulama)로 인도네시아 사회에서 이슬람 법률의 실행을 목적으로 했지만 정치 이념은 불분명해서 이슬람 이외의 특정한 정치 이념을 가지지 않았다. NU는 마수미당과 달리 사회를 근대화시키려는 전망을 가지지 않았다. 이 당은 자바 시골 거주자들과 지주들의 지지를 주로 받았다. 이렇게 모호한 이념적 정체성을 가진 당들이 당의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기반을 화해시키기는 힘들었다. 따라서 실제 정치적 과정에서는 무원칙한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였고 관직과 돈을 둘러싼 흥정들과 분파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큰 정당들은 장기적 과제를 가지지도 못했고 그것을 실현할 힘도 없었다. 그러나 정부 정책을 비토하는 것은 가능했다. 이런 정치시스템은 장기적 목표를 가지고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런 정치 체제를 단순히 실패라고 규정할 수만은 없다. 이 체제하에서는 어떤 이념적 흐름이나 사회 집단도 독자적으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하거나 완전히 패배해 소멸되지는 않을 수 있었다. 당시의 사회적 세력관계가 의회제라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통해 실현되었던 것이다. 의회제 자체가 아시아에 적합하다거나 그렇지 않다는 관점의 논의나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후진성 운운의 논의는 관념적인 접근일 뿐이다. 의회민주주의 역시 구체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도네시아의 사례는 보여주고 있다.

아무튼 인도네시아에서는 만연한 부패로 인해 의회체제에 대한 평판이 하락했고 이 체제가 정치적 목적은 물론 국가발전에 필요한 정책 채택을 막고 있다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새로운 정치 제도로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수카르노는 의회제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교도민주주의로의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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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현대사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해방이후 한국 현대사와 너무나 많은 공통점을 발견하고 놀랐다. 차이점도 많지만 그 차이도 동일한 틀에서 비교 가능한 성격의 것들인 경우가 많다. 식민지 경험과 반식민지 투쟁의 이념으로서 민족주의에 대한 강조, 냉전 질서로의 편입과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특히 경제발전 과정과 지식인, 관료 등의 엘리트 양성 과정에서의 미국의 치밀한 관여), 발전주의 모델의 한계와 경제위기 그리고 그 뒤에 온 급속한 신자유주의화 등등은 모두 인도네시아를 공부하면서 우리 사회를 다시 생각해 볼 주제들이다.

인도네시아 지도


먼저 민족주의 문제를 살펴보자. 오랜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겪었고 2차 대전 시에는 일본에게 점령되기도 했던 인도네시아가 해방 이후 새로운 국가 건설에서 민족주의를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채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는 근대 유럽의 그것이나 한국의 그것과도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발전했다. 먼저 인도네시아라는 민족 국가 자체가 최근의 역사적 산물이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인들은 명확히 이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기원은 네덜란드령 인도에 있다. 즉 식민지 점령 이전에 인도네시아라는 국가나 민족공동체가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가 점령한 지역들이 모여 단일한 민족국가를 새롭게 형성하게 되었다. 이는 다른 많은 민족주의처럼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단일한 민족이나 국가의 존재에 의존하지 않는 민족주의가 나타난 원인이 되었다. 고대나 역사 너머의 신화적 기원에 대한 호소 자체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에는 크게 필요하지 않았다.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하나로 묶여진 광대한 지역 안에는 지역적, 인종적, 문화적으로 (특히 종교적으로) 이질적인 사회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민족주의처럼 단일 혈통과 언어를 포함한 문화적 단일성이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것이라는 수사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렇듯 다양한 집단들을 묶어주는 하나의 조건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네덜란드 식민지배의 가혹함이었다.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모든 세력들이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식민통치의 종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른 식민지에서의 해방운동들이 대개 그랬던 것처럼 인도네시아의 해방 운동 세력들도 민족주의를 중요한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반식민통치 세력들은 대부분 단일 민족국가로서의 인도네시아 독립을 추구했고 해방 이후에는 근대적인 통일된 민족국가라는 전망을 갖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처럼 넓고 다양한 집단들이 공존하는 지역에서는 이렇게 통일된 독립민족국가 수립을 추구한 데서 오는 역설 또한 발생하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라는 말 자체가 1850년에야 유럽에서 인류학적 개념의 하나로 만들어진 말이다. 이 말은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와 같은 인류학적 용어로 만들어졌지만 네덜란드령 인도를 대신할 용어를 찾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20세기 초반부터 사용되어 널리 받아들여졌다. 인도네시아어가 전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는 언어로 존재했던 것도 아니다. 다수가 사용하던 말레이 어가 아니라 소수만이 사용하던 언어를 새롭게 공식 언어로 채택해서 민족 언어로 발전시켰다. 즉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는 처음부터 통일된 국가 건설이라는 정치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수단이었다. 따라서 유럽의 민족주의가 낭만적 복고주의의 색채를 띠기도 하는 것과는 달리 인도네시아 민족주의는 뚜렷한 근대지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945~49년의 네덜란드와의 독립 혁명 기간의 경험은 민족 자존심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인도네시아 인들은 1949년 이후의 세대들부터 공통된 교육을 통해 민족문화라는 공감대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의 민족주의는 지리적 강조를 특색으로 했는데 이것은 네덜란드 식민 세력과의 독립투쟁 과정에서 네덜란드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을 찾아오려는 투쟁의 과정에서 강화된 것이다. 그러나 단일한 민족정체성에 대한 대부분 국민들의 동의에도 불구하고 그 정체성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에 걸맞는 정치 형태를 결정하는 문제는 해방 후에도 상당 기간 미결정 상태로 남아 있었다.

수카르노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를 보면 민족주의가 초역사적인 본질이나 고대로부터의 기원을 갖지 않는다면 의미 없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 그리고 인위적인 산물인 민족주의 일반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이 터무니없는 해석임을 알 수 있다. 즉 본질주의적인 민족주의관이나 근대론적 민족주의 비판 모두 타당하지 않다. 민족주의 일반이란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민족주의는 그것이 발생하고 전개되는 환경 속에서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지고 다른 결과를 낳는다.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 또한 어떤 맥락에서 민족주의가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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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그중에서도 보통 한중일 삼국을 지칭하는 동북아시아 외의 지역이 나의 주된 관심사였던 적은 별로 없었다. 우리 사회의 대부분 사람들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특히 좌파 진영 내에서 유럽 이외의 지역에 대한 관심은 최근에 반짝했었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관심 정도인 것 같다. 돌이켜보면 좌파 진영 내에서 비서구사회에 대한 관심이 적었던 것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냉전과 급속한 근대화를 고통스럽고 숨 가쁘게 겪어 낸 우리나라의 풍토에서는 당연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기억하기에 80년대에는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지금보다는 높았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 시대 상황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 세대는 베트남전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한 세대다. 주변에서 베트남 참전 경험을 가진 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때로는 과장 섞인 전쟁담을 직접 듣기도 했고 학교와 뉴스에서 베트남전을 소재로 한 반공 선전을 수도 없이 받아야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이영희 선생의 베트남 전쟁에 관한 글들을 자연스럽게 읽었다. 참 크메르 루즈의 대학살을 다룬 킬링필드라는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유포된 것도 대학 신입생 무렵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베트남과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는 일상에서도 의식적인 학습에서도 사라졌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의 실용노선과 급속한 자본주의화 그리고 한국과의 화해 이야기만 간간이 언론을 통해 들었을 뿐이다. 베트남 외의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내가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저항운동들, 맑스주의 운동에 관심을 다시 가지게 된 것도 그 지역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가 아니었다. 한국 진보 진영의 지나친 유럽“이론” 지향성이 우리 사회에 도대체 실효성이 있는가에 대한 반성이 비서구에서의 저항적 “실천”에 대한 관심으로 이끌었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의 공산당이 비공산권 국가 중에서 가장 많은 당원을 가진 당이었다는 사실이나 또 이들이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큰 규모의 대학살 중 하나로 인해 붕괴되었다는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도 몇 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이 세상일들에 대해 균등한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는 반성 정도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지금과는 다른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다른 세상의 구체적 모습과 실현 과정을 고민할 때 참조할 수 있는 역사적 경험들이 좀 더 다양해져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좌파적 관점의 사람들에게는 실천적 관점이 더 절실하다. 그래서 내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맑스주의가 사변적 이론이 아니라 실천을 위한 담론이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학계 내의 관심에만 몰두한 유럽 좌파 학자들의 주장을 수십 년간 목숨 바쳐 투쟁한 수많은 민중의 이야기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는 한국 좌파들의 풍토는 지극히 비맑스주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지만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역사와 현실과 민중들의 저항에 대해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이제부터라도 공부하고 고민해 보려 한다. 실천적 관점에서 말이다. 좌충우돌하며 공부해 가는 과정을 블로그에 담을 것이다. 먼저 동남아시아부터 시작하겠다. 나라별로 공부할 생각인데 인도네시아가 첫 번째 나라다. 이 주제에 대해서도 역시 도움을 줄 이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 이 게시판의 글들은 세미나 네트워크 새움에서 진행하는 아시아의 저항운동 세미나에서 공부한 내용의 일부를 세미나 성원들이 함께 정리해서 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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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중남미와 라틴아메리카, 이베로아메리카는 각각 다른 용어이다.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중남미에는 멕시코가 들어가지 않으며, 라틴아메리카에는 푸에르토리코와 같은 비라틴어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이 포함되지 않는다. 이베로아메리카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지 않은 나라들은 제외된다.
따라서 연구자 별로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라틴아메리카로 통일되는 추세인 것 같다. 게시판의 제목은 "중남미"이면서 이 글의 제목에선 "라틴아메리카"인 이유는 그냥 편의성 때문이다. 게시판 이름은 짧고 굵은 것이 좋고, 글의 제목은 길게 써도 무방하니까. 다른 이유는 없다. 그러니 이러쿵 저러쿵 따지지 말자!

 





각설하고, 사실 어떤 글을 써야할 지 고민을 많이 했다.

나는 대학원에서 라틴아메리카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그렇다고 남들보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해서 더 많이 아는 것도 아니다. 비록 한국의 라틴아메리카 연구가 초보적 단계에 있다고는 하나, 지난 30여 년 동안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꾸준한 연구활동을 전개한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런 분들을 두고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설레발 쳐도 되나 싶은 걱정이 없진 않았다. 
그러나 걱정만 해서는 무엇이 되겠는가? 스스로 찾아서 공부하지 않으면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그리고 스스로 찾아서 한 공부만큼 남는 것도 없다. 나는 그렇게 굳게 믿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찾아서 공부한 것을 나누는 것. 그것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과 새움이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알량한 지식을 조금 더 가지고 있다고 으시댈 이유도 없으며, 지식이 조금 부족하다고 주눅들 이유도 없다. 자신의 생활에서 얻은 신념보다 강한 설득력을 지닌 지식을 나는 보지 못했고, 들어본 적도 없다. 이것이 내가 공부를 할 때 지키려고 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무엇을 공부하든 그것이 나의 삶과 어떤 연관성이 있으며, 나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인지 물으면서, 그리고 그 공부가 나를 비롯한 우리의 삶에 어떤 유효성을 지니는지는 물으면서 공부하고자 한다. 이는 실용적인 공부만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현실의 삶과 유리된 공부를 하지 말자는 의지다.


다시 라틴아메리카 얘기로 돌아오면, 최근 라틴아메리카 소식 중 단연 가장 중요한 것은 브라질 대선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라틴아메리카에서 분 '좌파' 바람으로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그런 관심이 얼마나 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여하튼 그런 '바람' 같은 관심은 잠시 제쳐두고, 2002년 브라질 대선에서 노동자당 후보 룰라가 당선된 때를 기억해보자.
그 때 한국의 진보진영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당시 한국은 민주노동당의 출범 이후, 진보정당 건설이 최대 화두였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브라질 대통령에 노동자 출신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진보진영에서의 반응이야 안 봐도 비디오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한국의 진보정당의 지도자들이 브라질로 견학가던 모습들은 소리없이 사라졌다. 진보진영 내의 룰라 '칭송'도 약속이나 한 듯 싹 사라졌다.
그리고는 하나같이 룰라를 '신자유주의좌파'라며 맹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브라질에서 신자유주의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건 룰라의 전임 대통령인 페르난도 엔리께 까르도조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룰라가 들으면 조금 억울한 비난일 듯 싶다. 더욱 재미있는 건 이러한 비난이 룰라를 '칭송'하던 그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이런 현상의 원인이 한국 진보진영의 라틴아메리카 역사에 대한 몰이해와 이론으로 현실을 재단하려는 경향,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 좌파들의 서구중심주의에 있다고 본다. 
한국의 좌파들은 룰라의 경이로운 지지도와 지난 8년 간의 국가 운영에 대해서 제대로 된 평가를 하지 않는 것일까? 의회를 통해서든, 다른 방식을 통해서든 권력을 장악하고 한 나라를 운영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온 국민의 70%가 지지를 보내는 대통령에 대해서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것이 한국의 좌파들이 지난 10여년 동안 지속적으로 몰락해가고 있는 것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룰라가 최고다, 룰라가 다 잘했다' 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룰라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하자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과 유사한 상황, 아니 더 열악한 상황에서 내/외적 곤란을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해 나가고, 결국에는 브라질 민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룰라에게 한국의 진보진영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좌파들이 룰라를 다시 진지하게 평가하려고 하고 할까? 대답은 대단히 회의적이다.

  
따라서 새움의 라틴아메리카 세미나에서는 라틴아메리카 역사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을 장기적인 과제로 삼고 있다. 이를 기반으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서 라틴아메리카의 제반 상황들을 이해하고, 한국의 상황에서 수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유럽중심주의라는 큰 산을 넘어야 할 것이다. 얼마나 성공적일지는 가늠할 수 없다. 그것은 함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단합하고 지혜를 모으느냐에 달려있지 않을까? 행여 실패하면 어떤가? 우리의 실패는 내일의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에는 '좌파'가 복귀한 것이 아니라 좌파가 탈식민적 흐름에 동참한 것이라고 보는 일단의 연구자들이 있다. 이들을 일컬어 라틴아메리카 근대성/식민성 그룹이라 한다.
이들은 최근에 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현상들이 '우'에서 '좌'로의 방향선회가 아니라 '탈식민적 전환'이라고 본다. 동시에 기존의 라틴아메리카의 좌파들의 이론과 실천이 유럽중심주의적이었음을 비판하고 있다. 우선 앞으로 10여 회에 걸쳐 이들의 논의를 학습한 결과물을 올릴 것이다. 그 이후에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에 대해 학습한 결과물을 게시할 계획이다. 

 
세미나네트워크 새움(
www.seumnet.com)의 라틴아메리카 세미나는 매주 수요일 7시 30분에 열린다. 새움의 모든 세미나 및 강의는 무료이며,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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